2002년 소녀혁명 우테나(少女革命ウテナ)세미나 발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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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테나의 회화적 특성 from B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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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우테나의 회화적 특성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우테나란 애니메이션은 연출, 스토리적 다양성과 수많은 상징과 더불어, 회화적인 특성에 있어서도 이야기 거리가 많습니다. 주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것은 아르누보적 특성인데요, 흔히들 아르누보라고 하면 장식성이 가미된 클림트의 회화를 떠올리실 겁니다.

클림트 대표작 '키스'

아르누보는 정확히는 식물,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유기적 인 곡선과 비규격화 된 형태를 지향하는, 당시 일어난 산업혁명을 통한 규격화에 반하여 일어난 공예 분야에서의 미술운동입니다. 공예부분이긴 하나, 공예가 가지는 장식성은 비단 3차원적인 조형물에 한정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사실은 아르누보적 장식을 자신의 회화에 도입한 화가들은 주로 여성의 관능성, 아름다움을 표현해 낸 작가라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보통 일반 회화에서 표현되고 있는 여성의 아름다움, 관능이란 주로 남성의 관음증적 흥미를 총족시키기 위한, '대상적인' 의미가 강합니다. 즉, 인격이 필요 없는 것이지요. 하지만 아르누보 계열 작가들에게 찾아볼 수 있는 '여성의 아름다움'은 그것과 좀 다릅니다. 이 그림들을 봐 주십시오,

당당한 자신의 주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욕망의 대상이 아닌, 하나의 인간으로서요. 피와 살을 가지고 호흡하는 인간성이 느껴집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짐작하시리라 생각되지만, 우연인지 필연인지 아르누보에서 표현된 여성은, 당당히 자신의 주체성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테나 내에 여성들에 관한 묘사와도 흡사하지요. 다른 예를 들어볼까요? 위 그림은 보시다시피 마네의 '올랭피아'를 오마쥬한 우테나의 한 장면입니다.

먼저, 이 올랭피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드리자면, 이 올랭피아는 처음 공개된 당시 엄청난 태풍의 눈이 되어버렸습니다. 왜냐하면, 그림 내의 창부는 그림을 보고 있는 자, 즉 남성의 대상으로써 존재하는 종이 위의 욕망이 아니라, 인격을 가진 인간으로서 훔쳐보고 있는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으니까요. 비난 하는 것도, 부끄러워 하는 것도 아닌 담담한 시선으로. 여성은 인간이 아니라고 여겼던 - 이 말은 과장이 아닙니다. 그리스 고대 민주주의 때만 해도 여성은 참정권을 가지지 못했으며 스위스의 어떤 주에서는 1990년 대가 되도록 여성에게 참정권을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키다리 아저씨' 에서도 볼 수 있듯 미국 역시 1900년대가 되도록 여성에게 참정권을 주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참정권이 없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자기 자신이 지키고 존중할, 또 자신을 살아가게 하는 제도와 규칙을 스스로 정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성이 가지지 못했다는 것은, 여성을 인간으로서 여기지 않았다는 증거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 그때 당시에만 해도 매우 파격적인 일이었습니다. 부끄러워 할 여성은 사라지고, 당당히 남성에게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는 여인-창부라는 설이 유력합니다만-에게 파리의 신사들은 충격을 먹었었죠. 원래 마네는 그런 충격을 던져주기 위해 그린 그림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는 여성의 주체성에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저 보이는 대로 가감 없이 그렸을 뿐인 데, 오히려 그런 정직성이 더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지요. 우리가 지금 명화라 부르고 있는 많은 여성 누드화는, 우리가 지금 여기고 있는 고귀함 과는 달리 대부분 남성들의 '욕망'의 필요성에 의해 그려졌습니다. 공개된 춘화나 다름없지요. 사진도 없던 시대이니 '현실감'을 위해 정교하고 사실적인 묘사 기술이 발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원래 그런 사실적인 묘사기술은 중세 미술의 주류를 이루었던 종교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긴 한데, 우테나의 관련 범위는 아니니 넘어가도록 하지요. 어쨌든 서양의 미술은 기능적인 역할이 주를 이루긴 하나 '도'라는, 정신적인 수양과 내면의 표출적인 기능도 했던 동양의 회화와는 달리, 철저하게 기능적인, 귀족이나 교회의 요구에 맞춘 기능공적인 역활을 훨씬 많이 수행했습니다. 그랬기에 근대에 이르러 개인의 감성을 토로하는 회화가 '표현주의'로 명명될 만큼 큰 반향을 일으켰던 것이겠죠.  표현주의란 고전 서양 회화의 표현 양식 즉 아카데믹한 표현 기법이 아닌, 자신에게 있어 가장 간절한 표현 양식, 다듬어지지 않은 거칠고, 직설적이며, 개성적인 방법으로 그려낸 회화들을 통칭하는 말입니다. 즉 담고자 하는 내용의 '개인성'뿐만 아니라 표현에서의 '개인성' 역시 중시한 회화 조류 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표현주의 회화들. 왼쪽부터 뭉크, 고흐, 에곤 쉴레 작.

아르누보 계열에서 파악되기도 하는 에곤 쉴레는 역시 표현주의의 영역에서 파악되기도 하는 데요, 에곤 쉴레의 그림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성적 적나라함, 그러나 그것은 얕은 유희를 위한 쾌락적 성이 아닌 우리가 직시해야 할 성의 추함과 죽음을 보여 주는 것이고 이 주제는 상당 부분 우테나에서 표현된 '성'과도 흡사합니다. 하지만 우테나는 성의 추함만을 묘사한 건 아닙니다. 마치 클림트의 회화 같은, 성의 희열과 아름다움 역시 표현해 내고 있지요. 우리는 우테나의 외형에서 에곤 쉴레의 그림과도 같은, 고개 돌리고 싶은 성의 적나라함과 추함을 느낍니까? 오히려 클림트의 그림에서 봐왔던 여성으로서의 매력,당당함과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우테나의 당당하고도 섹시한 일러스트들.

마네와 친했던 인상파 화가 르누와르의 그림과도 같은, 지켜주고픈, 사랑스러운, 가엾도록 귀여운 존재 같은 매력이 아니라, 클림트의 그림이나 마네의 올랭피아에서 같은, 당당한 주체성을 가진 존재로 자신의 매력을 부끄러움 없이 피력하고 있습니다.(얼마 전에 우테나 내에서의 여성성을 논하면서, 어떤 분이 시오리 같은, 기본 남성적 시각에서 말해온, 갸냘프고 스러질 것 같은 여성을 일반적인 여성성으로서 제시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와 비슷한 여성관을 가진 르누와르의 예를 들어볼까요? 르누와르는 '내 잠자리 옆에 변호사를 뉘이고 싶지 않다' 라며 여성 변호사 및 여성의 사회적 진출에 노골적으로 거부감을 표시한 인물인데요, 이것은 여성의 주체성과 자립을 공격성, 즉 남성화로 오인했기 때문에 빚어진 우화입니다. 즉, 우리가 일반적인 ‘여성’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여성상은 의외로 남성 중심적인 관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여성 그 자체의 본질과 동일하다고는 보기 힘들지요) 어쨌든 우테나 내에서는, 성의 빛과 어둠, 추함과 아름다움을 회화적 측면과 스토리적 측면을 교차해서 표현해 내고 있고, 언밸런스와 과도 같은 그런 연출은, 성의 추함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극대화 시켜, 보는 이에게 아찔할 만큼의 충격을 안겨줍니다.  자, 그럼 이번에는 우테나의 장식적 특성에 대해서 살펴볼까요? 장미의 각인 속 문양을 살펴봅시다.

마치 장미 줄기같은 선으로 문양을 그려내고 있지요? 이것이 바로 앞서 말했던 '자연의 형태를 빌어 만든' 아르누보적 장식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테나 속 아르누보적 장식성향은 뿐만이 아닙니다. 오오토리 학원의 문양, 꽃봉오리를 닮은 우테나의 티 컵, 가지가 뻗어나간 듯한 장식으로 이루워 진 결투장의 문, 그림자 소녀들의 보금터인 담벼락 무늬, 우테나의 가슴에 꼿는 꽃 고정핀의 곡선, 심지어 극장판의 기둥 장식과 우테나 카에 이르기까지 많은 부분들에 있어서 자연의 우아한 곡선을 토대로 한 아르누보적 장식이 쓰이고 있지요.

그에 대조해서 나타나는 장식성향은 아르누보 만큼 유명하진 않지만 코코 샤넬으로까지 이어진 '아르데코' 인데요,

아르데코 관련 조형들.

아르데코는 아르누보와 정 반대로 기하학적으로 단순화된 선과 면으로 표현하는 장식양식으로서 우테나 속의 대부분의 건축 양식과 디자인은 아르데코의 영향력 아래에서 생각할 수 있지요. 아르데코는 기하학적 선과 면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구성주의와도 맞닿아 있는 데요, 우테나 안에서 표현된 구성주의는 특히 극장판에 이르러 건축 양식에서 극대화 되었습니다.

구성주의 조형
우테나속 구성주의 성향의 배경 이미지

 끊임없이 교차하는 선과 화려한 색채, 절단된 면 무섭도록 날카로운 직선의 끝 등 부드럽고 자연스런 아르누보적 장식과 대조적으로 아이들에게 마치 '현실'의 차가움과 딱딱함을 전달하려는 듯 합니다. 하지만, 우테나 안에서의 구성주의는 기계적인 차가움이 아니라 절제됨 속의 우아함으로 그 세련미의 극치를 달리고 있습니다. 이런 화려한 배경미술에는 역시 미술감독인 고바야시 시치로의 힘이 컸겠죠. 개인적으로 우테나 만큼 고바야시 시치로의 힘을 끌어낸 작품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뭐, 이건 우테나의 캐릭터 디자이너인 하세가와 신야 역시 마찬가지 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의미에서 우테나 내에서 사용된 디자인은 일본 상업 애니메이션이 취할 수 있는 회화적 선택에 있어서는 최상이라 할 수 있는 데요, 그것은 정통 서양 회화 적인 풍부한 질감과 다양하게 변화하는 색채적 표현은 일본 상업 애니메이션의 근간을 이루었던 대량 생산 셀 애니메이션 에서는 힘든 표현이거든요. 도입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러게 되면 기존 일본 애니 제작 시스템에서 멀어지기 때문에, 시스템 안에서 취할 수 있는 가장 최적의 디자인을 취한 듯 싶습니다. 자, 그럼 이번에는 인물의 회화적 표현을 이야기 해 볼까요. 우테나 속 인물의 회화적 표현에 관해서는 하세가와 신야를 중점적으로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타이밍과 연출, 움직임 분야가 아닌 인물 자체와 동작의 표현에 있어서는  하세가와 신야의 영향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표현이 여럿 있는 데요, 일단 하세가와의 경우 우테나 속 인물의 관능을 아주 적절하게 표현해 냈습니다. 보통,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 속 관능이라고 한다면, 남성 시각적으로 여성이 대상화 된 식의 표현을 하기 쉽지요. 위에서 언급한 마네 이전의 여성 누드화가 그랬듯이.  하지만 하세가와는,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우테나의 인물들을, 특히 여성 캐릭터 같은 경우 마네의 올랭피아 와도 같은 당당한 성을 표현해 해냈습니다.

우테나의 당당하고도 섹시한 일러스트들.

부끄러워하지도 수줍어하지도 않습니다. 자신의 매력을 알고 어필하는 데 주저함이 없지요. 이것은 하세가와가 의도하던 의도하지 않았던 페미니즘 누드화와 맥락을 같이 합니다. 페미니즘 누드화는 남성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기 때문에, 당당하게 정면을 바라보는 여인의 누드화가 많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하세가와 신야의 캐릭터의 성적표현에 있어 여성의 관점을 취했다는 것은 남성의 대상화 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이 일러스트를 보십시오.

야오이 같은 여성의 욕망의 직접적인 투시는 아니지만, 남성이 여성의 시각에 의한 대상화가 되어 있습니다. 좀 더 정확히 이야기 하자면 대상화가 아니라, 남성 캐릭터가 여성이 보통 취하는 것으로 일컫어 지고 있는 수동적인 성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가수 박진영을 아시지요? 가수 박진영이 페미니즘 적 의미를 갖는 것은 자기 자신을 여성의 성적 대상화 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론 여성이든 남성이던 간에 서로의 성적 대상화-즉 인격없음으로 비화되지 않고 자신의 성을, 상대방을 억누르거나 지배하지 않고 표현하는 형태를 취했으면 하는 것이 바람입니다만, 박진영의 경우엔 여성의 판타지를 공식화 시켰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우테나는, 여성을 위한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양쪽 성의 불균형을 해소하고 성적 정치성의 공정함을 피력한 작품에 가깝습니다. 여성이 원하는 욕망을 발현해 내는 것이 아니라, 여성 그 자체를 드러내고 묘사함으로써, 여성이 자신의 언어를 갖게 하고, 주체성을 갖게 하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 그것이 이런 하세가와 신야의 일러스트에서 잘 드러나는 것이지요. 여성의 성적 매력을 표현함에 있어서 남성적 시각으로의 치우침 없이, 공정하고 분명하게 표현해 낸 점에 있어 하세가와는 지금까지 일본 애니메이션의 다른 애니메이터와 캐릭터 디자이너들이 하지 못했던 영역에 도달한 것이고, 어쩌면 그렇게 일반적이지 못한 영역에 도달했기 때문에, 그 후 일기당천이나 망각의 선율 같은 남성 시선 중심적 작품에서, 또 여성을 대상화한 일러스트를 그림에 있어 하세가와는 스스로 어쩌면 무력감을 느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똑같은 관능을 표현하려 한다해도, 우테나 외의 다른 많은 일본 애니메이션 속 여성 캐릭터들은, 우테나 속 캐릭터들 만큼의 주체성을 가지고 있지 못해요. 그러기에 그의 일러스트적 매력이 발현되지 못하는 것이지요. 현재 캐릭터 디자인을 맡고 있는 망각의 선율이나 일기당천의 일러스트 보다, 디지캐럿의 우사다를 그린 하세가와의 일러스트가 오히려 하세가와 신야 특유의 관능과 매력을 잘 표현하고 있던 것은 우사다가 그만큼 당당한 자기 정체성을 가진 여성 캐릭터이기 때문일 겁니다.

하세가와가 그린 디지캐럿

 우테나의 일러스트에 있어서는 하야시 아케미를 빼놓을 수 없는 데요, 관능의 성적 공정성을 확보한 것은 아니지만, 시네필님이 지적해 주셨듯 백합적인 분위기의 일러스트에 있어서는 하야시 아케미는 다른 의미로 여성적 시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백합이라는 말의 의미를 다시 짚고 넘어가자면, 우리나라에서 현재 마리미떼로 지배되고 있는 것과는 달리,백합은 남성향적의 가벼운 여성 동성애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 판타지 적인 여성동성애 물에서 출발했다고 보는 것이 좀 더 정확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마리미떼 같이 남성향으로 패러디화 될 가능성이 높은 작품이 남성을 줌심으로 국내에서 붐을 일으킴으로써, 국내에 백합=남성향의 동성애물 이라는 인식이 생겨버린 듯 합니다. 그리고 일본 내에서도 남성향쪽에서 백합이 새로운 코드로 떠오를 만큼 붐을 일으키는 추세여서, 애초의 추세였던 여성향의 백합이 그 입지가 좁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테나는 아직 남성향 백합 성향이 형성되어 지던 시기도 아니었었고, 우테나의 주 팬층이 남성이 아닌 주로 여성이라는 것을 토대로 할 때, 우테나 속 백합성은 여성향이라 파악 될 수 있겠지요. 그리고 그런 우테나속 여성향 백합을 잘 표현해낸 이가 하야시 아케미 였습니다. 남성 중심의 포르노적 여성 동성애가 아니라, 백합이라는 여성향에서 히메미야와 안시의 관계를 묘사했다는 점에서, 하야시 아케미 역시 페미니즘적인 성공정성을 확보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여성향 백합풍의 히메미야*우테나 일러스트. 하야시 아케미作

이번에는 우테나의 연출에서의 아트적 특성을 찾아 보도록 하지요. 우테나는 아방가드르적 애니라는 평을 종종 듣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우테나라는 작품의 독특함, 일본의 일반적인 상업 애니메이션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재치와 발랄함을 두고 그런 표현을 하는 듯 하는 데, 그런 관념적인 파악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우테나는 아방가드르적 성향을 다수 포함하고 있습니다.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이 바로 '헤프닝' 인데요, 아방가드르는 그야말로 기존의 예술이라는 개념 자체를 뒤집고 파괴하는 예술 성향이기 때문에, 때로는 '무의미'라는 뜻으로 일컫어 지기도 하지요. 우리가 우테나 내에서 저건 뭐지? 알 수가 없어 하는 부분들. 의미를 생각하려 할 수록 미궁에 빠져 결국 생각하기를 포기하게 하는 상징들. 개그에서 쓰여진 '알 수 없음' 뿐만 아니라 본 스토리 내에서도 무의미한, 무의미하기에 의미있는 헤프닝 적 연출이 많이 엿보입니다. 우테나 에서는 애니메이션이란 매체의 특성을 이용해,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아방가드르적 헤프닝을 많이 선보였는 데요, 가장 큰 예로 학생회의 모임 주위에 벌어지고 있는 정경입니다. 헤프닝은 때론 학생회 일원들이 주체가 되어 벌어지기도 하고, 학생회 임원들과 무관하게 진행되기도 합니다. 회의 도중에 벌어지는 야구 시합, 토가의 칼던지기 쇼, 풍선 날리기, '세계의 끝'에서 온 편지로 식사하기, 회의하면서 안마 기계 돌리기, 장미꽃 색깔 바뀌기, 총쏴서 꽃 터트리기, 듣는 사람 없는 기자회견 하기 등등 벌어질 필연성 없는 헤프닝들로 가득합니다. 또, 학생회의 뿐만 아니라 흑장미 편에서 결투장에 놓여진 책상들, 책상의 움직임(물리적으론 아무런 힘이 가해지지 않았는 데 책상이 저절로 움직일 리 없죠), 화살표의 존재감과 깜빡거림,  아키오 편과 학생회편의 대결에서 등장하는 아키오카. 아키오 카 위에서 매번 벌어지는 아키오의 서커스 등등도  아방가드르적 헤프닝으로 파악하기에 큰 무리가 없죠. 그럼 어째서, 아방가드르적 헤프닝이 우테나에 삽입되어야 했을까. 하는 의문에 부딪히게 됩니다. 돈이 없어서 심지어 오프닝의 액션씬 마저 우려먹는 처절함이 엿보이는 데...(이건 농담입니다) 그건 아마도 아방가드르가 가지는 '가치 파괴' 때문일 겁니다. 이쿠하라가 밝혔듯 우테나는 '되고 싶은 어른을 찾을 수 없는' 아이들을 위한 것입니다. '배틀로얄2'에서는 극단적으로 어른들과의 물리적 전쟁을 통해 존경 할 수 있는,  되고 싶은 어른이 없는 세계를 파괴하려 했다면, 우테나에서는 기존 질서의 정신적 파괴를 통해 그 목적을 달성하려 하는 것입니다. '알의 껍질을 파괴 하지 않으면, 새는 죽어버린다' 라며 주술처럼 반복되는 대사처럼 말이죠.

  아르누보, 표현주의, 아르데코, 구성주의, 아방가드르 등 회화 및 예술적 주의로 파악해 본 우테나는, 여성적 가치를 현대적으로 재해석, 표출하려 했으며 장식적이면서도 절제된 디자인으로 화려함과 세련됨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시각적 쾌락을 선보였으며, 헤프닝을 통해 기존 질서의 정신적인 파괴까지 시도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파악한 우테나속의 아트적, 예술적 특질입니다. 어떠셨는지요? 이것에 관한 질문과 반론을 듣기에 앞서, 우테나의 예술적 특질과는 상관 없지만, 제가 꼭 제기하고 싶었던 논쟁거리를 몇 가지 제시하면서 마무리 짓겠습니다. 이것은 제가 아직 구체적으로 연구한 적이 없으나, 충분히 논쟁의 소지가 있고 연구되어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문제인데,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우테나라는 애니메이션은 애니메이션 화 하기 힘들다는 순정만화의 애니메이션화를 위한 방법론을 제시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사이토 치호가 그린 코믹스 판을 우테나의 원작으로 보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테나에서 표현된 연출들, 예를 들자면 이런 연출

극히 평면적이죠? 이 것말고도 토가와의 결투씬에서는 늘 등장하는 화면속의 화면, 히메미야가 칼에 찔릴 때의 화면 분할, (컷이 세 개로 나눠지면서 각각 다른 각도로 히메미야가 칼에 찔리는 장면을 그림자만으로 연출하지요) 그렇듯 우테나의 연출은 물론 어느 정도의 기본적인 공간감은 유지하고 있지만 굉장히 평면적인 연출이 많습니다. 즉 정서적인 연출이지요. 정서적이라는 것은 추상적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극대화 된 것이 그림자 소녀이지요. 이것은 유아적인 단순성으로 치부한다면 어쩔 수 없으나 우테나의 연출적 모티브가 되었다는 ‘다카라즈카’를 떠올리면 단순히 그렇게 치부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본 다카라즈카는 우테나 LD의 부록으로 삽입된 우테나의 다카라즈카 밖에 없으나, 다카라즈카를 실지로 관람하고 돌아온 이들이 하는 이야기는 같더군요. ‘순정만화의 시각화’ 즉 순정만화를 어쨌든 움직이는 형태, 추상적인 글과 그림 뿐 만이 아닌 오감으로 느낄 수 있게 한 것이라는 뜻인데요, 여성적 욕망의 구체적인 형태인 순정만화를 그렇게 ‘애니메이션화’-라는 건 ‘생명을 불어넣었다’라는 어원적 의미에서- 시켰다는 점에서는 우테나 안의 연출과 아주 깊숙이 연관되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비교적 발달된 여성 문화라 할 수 있는 순정만화를 토대로 해서, 우테나 속에서 찾을 수 있었던 순정만화의 애니메이션화적 가능성을 바탕에 둔 애니메이션이 많이 만들어 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어쩌면 제가 애초에 우테나란 애니메이션에 매혹된 것도, 그런 가능성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테나 속의 여성적 연출은 제가 말씀드린 것 외에도, 무궁무진 합니다. 제가 그것을 캐취해 내고 표현해 낼 언어를 미처 찾아내지 못했을 뿐. 제 말이 작은 씨앗이 되어, 앞으로 아마도 애니메이션을 계속 사랑하시고 또 그쪽을 발전시킬 여러분들에게 하나의 다른 시각을 제시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면 기쁘겠습니다. 뱉이었습니다.

2004. 07. 25. BAT 소녀혁명 우테나 세미나 ~지금 함께 빛나줘~ 에서...